2025년 10월 14일 13장

벽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하면 내가 흔들리지 않을 지 20대의 많은 시간을 투자한 끝에 다다른 결론이다. 단점 보완과 장점 극대화. 축구를 좋아하는 나에게는 선수를 판단할 때 가장 자주 쓰는 표현이다. 포지션에 따라서 어떤 선수는 장점을 극대화 시켜야지만 살아남을 수 있고 어떤 선수는 단점을 보완해서 무난한 육각형이 되어야만 살아남기도 한다. 다만, 인생 전반을 놓고 보면 쉽사리 답변하기 어려운 질문인 듯 싶다. 이전 일기에서도 다룬 적이 있지만 지난 10년을 돌아보면 크게 두 번의 변혁을 겪었다.  올해 한국 나이로 26살이니까 16살, 중3의 나로 돌아가보자. 고등학교 3년은 분명히 뜻 깊었던 시간이었다. 내가 얼마나 자기 잘난 맛에 살았고 슬프지만 이 세상에는 나보다 더 잘난 사람이 한 트럭이 아니라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는 걸 깨달은 시간이었다. 물론, 이 모든 건 내 기준에서 잘났다는 소리지만. 또, 나의 말과 행동이 타인에게 끼치는 영향에 대해서 처음으로 진지하게 생각해 본 시기였다. 조금 과하게 나를 질책하던 과거의 순간이기도 했다. 내 모든 걸 내려놓았고 부정했다. 과거의 것들을 다 부수고 새로 짓기로 했다.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 내가 더 완벽해지면 모든 게 완벽해질 거라고 생각했다. 왜냐면 이 세상에서 문제을 일으키는 건 나였으니까. 그런 마음가짐으로 살다보니 20대 초반의 끝에 와 있었다. 그 시간 전부가 행복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런 삶이 어디있겠는가. 그래도 행복과 슬픔이 혼재되어있었고 굳이 따지자면 행복했던 순간이 더 많았을테다. 내가 그렇게 지켜온 삶의 태도가 달라지는 계기가 있었다. 일단, 내가 완벽해진다는 건 존재하지 않는 현실이다. 세상에 내가 완벽해져서 행복하고 고통 없는 일상만 가득한 현실은 없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나니 좀 괜찮아졌다. 그리고, 내가 최선의 선택을 내려도 (그런 현실이 없다고 이미 자각했지만) 가끔 세상이 나를 억까하는 순간들도 존재한다. 그러니까, 그냥 살아가야한다는 사실을 ...

2025년 9월 20일 12장

모처럼 자판 앞에 앉았다. 항상 하는 말이지만 내가 글을 쓰지 않는다는 건 내가 생각을 글로 정리하지 않아도 될 만큼 건강하게 살아간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11장과 12장의 간극이 긴 만큼 내 인생이 무척이나 잘 흘러갔다는 뜻이다. 물론, 오늘 내가 글을 쓰는 이유는 큰 고난을 마주했거나 이미 낭떠러지로 떨어지고 있는 중이라서는 아니다. 아마 매우 오랜만에 긍정적인 의미에서 글을 쓰는 것 같다. 결론이 긍정적이고 배운 점이 있다고 한들 그 시작은 부정적인 감정과 경험인 경우가 많았는데 오늘은 여러 생각들이 교차하다보니 뭔가 오랫동안 고민하던 질문이 해결 된 그저 철학적인 사유의 결과물을 기록해두는 거다. 나는 어떤 현상을 보면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나에게 "왜"라는 질문은 그 무엇보다 중요하고 필수불가결한 정보이다. 도대체 무슨 연유로 사람들은 그런 선택을 하고 그런 삶을 사는 건 지에 대해서 나는 그들을 이해하려고 애를 써왔다. 하지만, 이 노력은 사실 의미가 없다는 것을 오랫동안 모르고 살아온 듯 하다. 우선, 나는 타인을 이해할 능력이 없다. 나 뿐만 아니라 그냥 인간은 다른 인간을 이해할 수 없다. 그 정도의 차이는 있을 지 언정 어차피 타인을 온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다만, 이해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최근 2년의 시간은 그랬던 것 같다. 누군가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며 산거다. 이유가 있을 거라고 지금의 나는 이해하지 못하지만 언젠가는 이해할 수 있는 이유가 있을 거라고. 근데 재밌는 사실은 사람들은 종종 본인이 어떤 선택을 내린 그 이유를 스스로도 잘 모르는 경우가 있다. 그냥이라고 말하자면 조금은 가벼우니까, 직관이나 본능이라고 할까나. 마음 가는대로 행동한 거다. 물론, 이성적으로는 정확히 설명이 되지 않겠지만, 다들 그런 순간들을 경험해보지 않았는가. 이렇게 해야한다고 내 온 몸의 세포들이 소리치는 그런 순간들. 그러니까 다시 말하면 타인을 완벽히 이해하는 건 불가능한데, 그걸 넘어서서 ...

2024년 12월 17일 11장

이 시즌이 되면 기분이 묘하게 나쁜 날들이 있다. 일조량이 적어진 탓에 정말 생리/심리학적으로 기분이 좀 꿀꿀한 걸지도 모른다. 아니면 크리스마스-새해 시즌이 오는데 이번 겨울에 한국에 안 돌아가니 가족들이 그리워서 그러는 걸지도 모른다. 이유가 뭐든 지 간에 감정을 컨트롤하는 게 쉽지 않은 시즌이다.  이 글을 쓰면서도 오늘 왜 내가 기분이 안 좋았는 지 되물었지만, 이유만 찾았을 뿐 그 이유가 왜 내 기분을 안 좋게 한 지에 대한 시원한 답을 내놓지 못했다. 시험이 이틀 남았는데 공부를 많이 못해서? 제일 말도 안되는 핑계다. 어차피 시험 전까지 공부는 다 할 수 있다는 걸 스스로 너무나도 잘 알고 있고, 시험도 잘 볼 거라는 자기 믿음/확신은 적어도 대학에 와서 가져보지 않은 적이 없으니까. 집 키를 잃어버렸다고 생각해서? 사실 그렇게 호들갑 떨 일도 아니다. 집 키를 잃어버리면 어차피 옆 방 분 키를 다시 복사하면 그만이다. 그리고 올해 들어서 방문에 키를 꽂아놓고 밖에 나온 적이 몇 번인지 셀 수 조차 없다. 오늘 학과 크리스마스 파티가 있었고 만나기 껄끄러운 사람들이 많아서? 아니라고 부정하진 않겠다. 내가 느낀 불편하다는 감정은 솔직한 것이고 같은 공간에 있는 것이 부담스럽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 감정들이 어디서 비롯되는 지는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서 다르다. 누군가에게는 분노를 느끼기도 하고, 누군가에게는 미안하기도 하며, 누군가에게는 이 두 감정를 동시에 느낀다. 슬프게도, 왜 아직까지도 내가 이런 감정들을 느껴야만 하는 지, 혹은 이런 감정들을 내가 스스로 느끼게 끔 만드는 지는 모르겠다. 지금까지 얻은 결론은 다소 빈약한 것들 뿐이다.  1. 내가 했던 반 년 정도의 연애가 내 인생에서 매우 큰 의미를 가졌으며 소중했다. 2. 그 마무리가 다소 어지러웠던 이유와 책임은 나한테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내가 좋지 못한 결정을 내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여전히 화나있고, 미안해하며, 복잡미묘...

2024년 10월 22일 10장

오늘은 한 친구와 있던 일화를 기억해두고자 글을 쓴다. 네덜란드에 처음 와서 대학 때 만난 친구들과는 어느새 5년 넘게 알고 지내고 있다. 그 사이에, 코로나와 군대라는 좋지 않은 상황에서도 이 우정은 끈끈하게 유지되었고 내가 이 곳에서 석사를 하고자 결정하게 된 이유에는 내 친구들의 존재도 분명 크게 작용하였다. 걔 중에서 패트릭이라는 친구가 오늘의 주인공이다. 폴란드 출신이지만 브뤼셀에서 인생의 절반 인생을 보내서 내가 유사 벨기에인이라고 놀리곤 한다 (물론, 이 드립을 매우 싫어한다). 이 친구의 특징이라면 사람이 냉소적이다. 다만, 그 특유의 냉소적인 유머가 그가 가진 성격의 매력이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알고는 있지만 잘 보지 못하는 그의 다른 매력은 마치 인생 2회차인 듯한 삶에 대한 달관의 태도와 성숙함, 그리고 그 사이에서 스며나오는 다정함이다. 굳이 비유하자면 말하는 내용은 성진이와 유사한데, 이 내용을 전달하는 태도는 마치 F와 같달까나... 최근에도 학과 건물에 가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이유는 뻔하디 뻔해서 말하는 게 구차할 수준이다. 전 여자친구를 보는 것도 불편해 죽겠는데 그 사람이 다른 사람과 연애하고 있는 걸 봐야하는 건 내가 어디까지 참을 수 있는 지 스스로 시험하는 꼴과 다름 없다. 어제도 그냥 그런 일상이었고 가뜩이나 과제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던 상황이라 같은 팀원한테 조별 과제 중에 약간 망나니 같이 굴어서 그것도 마음에 걸렸었다. 과제가 다 끝나고 나서, 로비에 앉아있는 패트릭한테 이것저것 이야기하다가 그 끝이 앞서 말한 주제로 흘러갔다. 패트릭은 내가 작년에 헤어지고 나서 어떤 상태였는 지 옆에서 지켜본 친구들 중 한 명이고 내가 어디까지 망가졌었는 지, 그리고 그걸 이겨내기 위해서 어떤 노력을 했고, 하고 있는 지 다 아는 친구라서 편하게 이야기 할 수 있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렇게 내 생각들을 주거니받거니 하다보니 참 좋은 말들을 그가 해줬다. 먼저, 내가 석사를 마치고 나면 레이든 혹은 네덜란드를 떠날 것이...

2024년 9월 27일 9장

몸이 피곤하다, 몸이 아프다. 그러면 여지 없이 마음이 피곤해진다, 마음이 아파진다. 마음이 피곤하다, 마음이 아프다. 그러면 여지 없이 몸이 피곤해진다, 몸이 아파진다. 그러다보면 몸과 마음 중 어디가 먼저 문제였는 지 분간이 되지 않는 순간이 찾아온다. 지금이 그렇기에 다시 이 곳을 찾아왔다. 몸과 마음이 피곤하면 머리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한다. 내 생각은 수 많은 아이디어를 창조해내고 그 중에서 쓸모 없다고 판단되는 것들을 배제하고, 유용한 것들만 걸러내는 원리로 움직인다. 그런데, 이 기능이 꺼지면 나는 내가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을 그 어떤 여과 과정 없이 받아들인다. 그리고 십중팔구 그런 상황에서 나는 부정적인 생각과 감정에 휩쓸린다. 어떠한 의미있는 결론에 도달하지 못하고 그저 감정의 파도에 표류하는 나를 어찌하지 못한 체 가라앉고 만다. 분명 그 생각과 감정들은 내 삶과 무관계한 경우가 더 많은 데도 내 기분을 결정하고 있다는 사실이 불편하다.  불편하다. 이 단어보다 내가 느끼는 감정을 더 잘 대변하는 단어는 없다. 내 삶을 복구시키기까지 무려 1년이란 시간이 걸렸고 지금도 진행 중이다. 지금 삶에 매우 만족한다. 그 어느 때보다 친구들과 진심으로 통하고 있다고 느끼며, 석사 과정도 큰 문제없이 흘러가고 있다. 앞으로는 2년이라는 시간이 남았으니 모든 게 잘 될 것이라는 이른 확신을 가질 수는 없으나, 지금까지는 내 삶에서 기쁨을 찾으며 살고 있다. 정확히 무슨 감정인지 알 수는 없지만 연락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불편하다. 그리고 이 불편함이 나의 말과 행동을 계속 의심하도록 만든다. 그래서, 이 불편함에 점점 지친다. 이 불편함은 사실 익숙한 맛이다. 고등학교 때 겪었던 두 사건의 중간 그 어딘가에 있다고 하면 될까? 이 불편함은 상대방 자체에 초점이 맞춰져있는 것보다는 스스로의 양심에 기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 나는 내가 잘못 했다는 것을 안다. 그 잘못이 정말 잘못인지 실수인지나 객관적으로 누구의 책임이 더...

2024년 9월 3일 8장

학사 졸업 논문을 제출하고 여름을 한국에서 보낸 뒤 이 곳에 돌아오면 모든 게 달라질 것이라고 믿었다. 어쩌면 그렇게 믿지 않고서는 지난 학기를 버틸 수 없었던 걸지도 모른다. 슬프게도 내 믿음은 희망사항에 불과했다. 돌아온 대학, 새로 시작하는 석사 과정. 하지만, 그다지 달라진 건 없었다. 절망스러웠냐고 물어본다면 아니라고는 못하겠다. 어쨌든 믿음이란 건 희망이란 건 이루어졌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담긴 것들이니까. 그래도 지난 1년 동안 확실히 알게 된 것이 있다면 스스로가 많이 변했다는 사실이다. 이런 상황도 툭툭 털고 일어날 수 있는 강한 정신력을 갖췄다고 해야할까나. 나한테 벌어지는 일들에 최대한 일희일비하려 하지 않고 그럴 수 있다는 여유로운 마음가짐을 가지려고 노력했고 여전히 노력 중이다. 이번 여름, 아버지와 함께 가장 많이 나눈 이야기는 '선'에 관한 것이었다. 인생에는 우리가 결정해야하는 선이라는 게 존재한다. 대표적인 예를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상충되는 두 격언를 비교하며 들어본다. "최선을 다해 절실하게 노력하고 간절하게 이루길 바란다면 불가능한 목표도 성취할 수 있다.", "크게 기대하지 않아야 크게 실망하지 않는다.". 단어의 미묘한 차이가 있지만 이 두 격언을 동시에 듣고 있다면 도대체 내가 어떻게 살라는 건가 의구심이 들게 된다. 불가능한 목표라도 열심히 꿈을 꾸면 달성할 수 있다? 아니면 불가능한 목표니까 너무 큰 기대를 하지 말아야 실패했을 때 타격이 크지 않다? 내가 도달한 결론은 나의 최우선 목표를 향해서 그 목표가 유일한 길인 것처럼 열심히 노력하고 도전하되  실패했을 경우를 위해서 안전망(2번째 목표)을 준비해두고 실패하더라도 너무 오랫동안 실망에 잠겨있지 말고 다른 목표를 향해 나아갈 것이라는 정의였다. 이렇게 문어적으로도 길게 서술해야하는 나의 '선'을 만들어나가고 지키는 과정은 험난할 뿐이다. 요즘은 하루하루 이렇게 '선'에 대해서 고민하고 ...

2024.06.17 7장

최근에 에드 시런이 subtract 앨범을 준비하던 시기를 다룬 다큐, The Sum Of It All, 를 봤다.  올해 초부터 기타를 연주하기 시작하면서 에드 시런의 노래를 더 많이, 자주 들었다. 원래부터 좋아하는 가수고 살면서 꼭 콘서트에 가보고 싶은 뮤지션이지만, 다른 이유로도 의미를 많이 부여했다. 지난 여름에 헤어지고 나서, x가 좋아하던 테일러 스위프트 노래를 한 동안 미친듯이 들었었다. 그렇게 하면 뭐라도 바뀔 줄 알았나보다. 아니면 테일러가 이별 노래를 미친듯이 잘 만들어서 내가 너무 이입되었는 지도 모른다. 테일러 스위프트 노래를 이제 자주 듣지 않는다. 여전히 테일러의 노래는 좋다. 어떤 곡들은 가사가 여전히 내 이야기 같아서 노래를 듣고 있자면 마음이 불편할 정도다. 이 두 명의 세계적인 싱어송라이터는 유명한 친구 사이이다. 내가 이별 후에 많은 시간 동안, 테일러가 x를 대변하는 인물처럼 받아들였기에, 역설적으로 에드 시런은 나를 대변하는 인물처럼 받아들였다. 그렇기에 나한테 에드 시런 노래를 듣는다는 것은 이전의 관계를 온전히 놓아주고 나에게 집중한다는 의미가 있다. 앞서 말한 다큐와 에드 시런의 subtract 앨범의 주된 내러티브는 에드 시런의 친구, 자말의 죽음 그리고 그 죽음을 받아들이는 그의 태도와 심리 상태이다. 다큐를 보는 내내, 그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일 때마다 마음 한 켠이 불편했다. 그의 모습에 나의 모습이 투영되어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죽음과 이별을 같은 선상에 두고 싶지는 않지만, 그도 결국은 사람이고 살다보면 어려운 순간들은 항상 온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다큐에서 보여지는 그는 그저 30대 초반에 청년이고 아직 누군가를 잃는 일을 대처하는 모습이 많이 낯설어 보였다. 그의 앨범에는 친구와의 이별을 표현한 곡이 많이 담겨있다: eyes closed, end of youth, life goes on, colourblind. 하지만, 가사에서는 친구의 죽음을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지 않아서, 그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