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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9월 27일 9장

몸이 피곤하다, 몸이 아프다. 그러면 여지 없이 마음이 피곤해진다, 마음이 아파진다. 마음이 피곤하다, 마음이 아프다. 그러면 여지 없이 몸이 피곤해진다, 몸이 아파진다. 그러다보면 몸과 마음 중 어디가 먼저 문제였는 지 분간이 되지 않는 순간이 찾아온다. 지금이 그렇기에 다시 이 곳을 찾아왔다. 몸과 마음이 피곤하면 머리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한다. 내 생각은 수 많은 아이디어를 창조해내고 그 중에서 쓸모 없다고 판단되는 것들을 배제하고, 유용한 것들만 걸러내는 원리로 움직인다. 그런데, 이 기능이 꺼지면 나는 내가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을 그 어떤 여과 과정 없이 받아들인다. 그리고 십중팔구 그런 상황에서 나는 부정적인 생각과 감정에 휩쓸린다. 어떠한 의미있는 결론에 도달하지 못하고 그저 감정의 파도에 표류하는 나를 어찌하지 못한 체 가라앉고 만다. 분명 그 생각과 감정들은 내 삶과 무관계한 경우가 더 많은 데도 내 기분을 결정하고 있다는 사실이 불편하다.  불편하다. 이 단어보다 내가 느끼는 감정을 더 잘 대변하는 단어는 없다. 내 삶을 복구시키기까지 무려 1년이란 시간이 걸렸고 지금도 진행 중이다. 지금 삶에 매우 만족한다. 그 어느 때보다 친구들과 진심으로 통하고 있다고 느끼며, 석사 과정도 큰 문제없이 흘러가고 있다. 앞으로는 2년이라는 시간이 남았으니 모든 게 잘 될 것이라는 이른 확신을 가질 수는 없으나, 지금까지는 내 삶에서 기쁨을 찾으며 살고 있다. 정확히 무슨 감정인지 알 수는 없지만 연락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불편하다. 그리고 이 불편함이 나의 말과 행동을 계속 의심하도록 만든다. 그래서, 이 불편함에 점점 지친다. 이 불편함은 사실 익숙한 맛이다. 고등학교 때 겪었던 두 사건의 중간 그 어딘가에 있다고 하면 될까? 이 불편함은 상대방 자체에 초점이 맞춰져있는 것보다는 스스로의 양심에 기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 나는 내가 잘못 했다는 것을 안다. 그 잘못이 정말 잘못인지 실수인지나 객관적으로 누구의 책임이 더...

2024년 9월 3일 8장

학사 졸업 논문을 제출하고 여름을 한국에서 보낸 뒤 이 곳에 돌아오면 모든 게 달라질 것이라고 믿었다. 어쩌면 그렇게 믿지 않고서는 지난 학기를 버틸 수 없었던 걸지도 모른다. 슬프게도 내 믿음은 희망사항에 불과했다. 돌아온 대학, 새로 시작하는 석사 과정. 하지만, 그다지 달라진 건 없었다. 절망스러웠냐고 물어본다면 아니라고는 못하겠다. 어쨌든 믿음이란 건 희망이란 건 이루어졌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담긴 것들이니까. 그래도 지난 1년 동안 확실히 알게 된 것이 있다면 스스로가 많이 변했다는 사실이다. 이런 상황도 툭툭 털고 일어날 수 있는 강한 정신력을 갖췄다고 해야할까나. 나한테 벌어지는 일들에 최대한 일희일비하려 하지 않고 그럴 수 있다는 여유로운 마음가짐을 가지려고 노력했고 여전히 노력 중이다. 이번 여름, 아버지와 함께 가장 많이 나눈 이야기는 '선'에 관한 것이었다. 인생에는 우리가 결정해야하는 선이라는 게 존재한다. 대표적인 예를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상충되는 두 격언를 비교하며 들어본다. "최선을 다해 절실하게 노력하고 간절하게 이루길 바란다면 불가능한 목표도 성취할 수 있다.", "크게 기대하지 않아야 크게 실망하지 않는다.". 단어의 미묘한 차이가 있지만 이 두 격언을 동시에 듣고 있다면 도대체 내가 어떻게 살라는 건가 의구심이 들게 된다. 불가능한 목표라도 열심히 꿈을 꾸면 달성할 수 있다? 아니면 불가능한 목표니까 너무 큰 기대를 하지 말아야 실패했을 때 타격이 크지 않다? 내가 도달한 결론은 나의 최우선 목표를 향해서 그 목표가 유일한 길인 것처럼 열심히 노력하고 도전하되  실패했을 경우를 위해서 안전망(2번째 목표)을 준비해두고 실패하더라도 너무 오랫동안 실망에 잠겨있지 말고 다른 목표를 향해 나아갈 것이라는 정의였다. 이렇게 문어적으로도 길게 서술해야하는 나의 '선'을 만들어나가고 지키는 과정은 험난할 뿐이다. 요즘은 하루하루 이렇게 '선'에 대해서 고민하고 ...